[편집자 주] 시흥타임즈는 안광일 건축사사무소 오막 소장과 함께 시흥의 역사와 도시 형성 과정, 앞으로의 발전 방향을 살펴보는 기획 연재 ‘시흥, 도시읽기’를 시작한다. 연재는 총 3부, 10편으로 구성된다.
1부. 도시의 역사를 읽다. ① 수도권의 변경, 시흥 - 시흥의 행정구역 변천사, 수도권의 확장 속에 시흥의 위치 ② 소사면과 소래면 - 경인공업지역 편입이 가른 소사면과 소래면의 운명 ③ 지적도에 남겨진 뱀내장터(우시장)의 흔적 - 지도에서 옛 흔적 찾기 |
① 수도권의 변경, 시흥
[글: 안광일 건축사사무소 오막 소장·우리동네연구소 운영위원]
시흥이 아닌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시흥시'는 흔히 수도권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신도시 정도로 인식되지 않을까. 하지만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시흥은 굉장히 흥미로운 도시다.
보통 시가지의 중심에는 도심이 자리잡기 마련이지만, 시흥은 한가운데 호조벌이라는 벌판이 있고 그 벌판을 중심으로 주거지가 빙 둘러 펼쳐져 있다. 서쪽으로는 갯골을 거쳐 서해와 맞닿고, 남쪽에는 시화산업단지가 있으며, 북쪽으로는 부천·인천, 동쪽으로는 안양·광명 등 주요 도시들과 접해 있다. 수도권에서는 흔치 않게 바다와 농업, 산업단지가 한 도시 안에 공존하는 모습이다.
시흥은 어떤 도시인가. 시흥에서 나고 자라 이곳에서 건축을 설계하고 도시를 연구해 온 나에게도 이 물음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도시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바람과 물이 빚어낸 자연지형 위에 사람들이 모여 길을 내고 집을 짓고 학교와 상점을 세우는 과정이 수십 년, 수백 년에 걸쳐 켜켜이 쌓여야 비로소 도시가 된다. 도시 곳곳을 들여다보면 지명과 지형, 지적, 길과 건물 속에서 그런 옛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
이번 시흥타임즈 연재에서는 그 옛 흔적과 역사를 하나씩 찾아가며, 시흥이라는 도시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으며 앞으로 어떤 도시가 되어야 하는지를 함께 읽고 논의해보려 한다.
"시흥시는 원래 시흥이 아니다."
지금의 시흥시에는 애초에 '시흥'이라는 이름의 중심지가 없었다. 정작 '시흥'이라는 이름이 태어난 원래 자리는 지금의 금천구 시흥동 일대였다. 현재의 시흥시는 원래의 시흥군이 아니라, 부천군과 안산군 일부가 합쳐져 만들어진 도시다.
아래 지도를 보면 더욱 놀랍다. 보라색은 1910년 시흥군이고, 하늘색은 현재의 시흥시다. 두 지역은 이름은 같지만 서로 단 한 평도 겹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시흥은 지금의 금천구청이 있는 시흥동 일대다. 당시 시흥은 이 시흥동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영등포, 남쪽으로는 지금의 광명과 안양 일부를 아우르는 곳이었다.

그러나 1914년 조선총독부가 통치 효율을 명분으로 군·면통폐합을 단행하면서 사정이 달라진다. 시흥군은 아래 지도처럼 과천군 전부와 안산군 상당 부분을 흡수해, 당시 경성 서남부 일대를 아우르는 거대한 행정권역이 된다. 이때 비로소 지금 시흥시 남부 지역인 옛 군자면이 시흥군으로 편입되지만, 북부 지역인 소래면은 여전히 부천군 소속으로 남아 있었다.

1914년에 통폐합된 행정구역은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지다가,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들어 인구가 급격히 늘고 도시가 팽창하면서 다시 변화를 맞는다. 1936년 영등포 일부가 먼저 경성부로 편입되고, 해방 후인 1955년에는 지금의 영등포·동작구 일부가 서울로 편입된다. 그러다 1963년 서울의 대확장으로 지금과 같은 서울시 경계가 확정된다. 이때 동작구·관악구·금천구·서초구가 시흥군에서 서울로 편입된다.

1914년 일제의 군·면통폐합으로 서울 서남부를 모두 아우르는 거대 행정구역이 되었던 시흥은, 바로 이 지점부터 서울과 수도권의 팽창에 밀려 점점 작아지기 시작한다.
해방과 전쟁을 거친 가난한 시절, 국가는 서울을 중심으로 산업을 키워갈 수밖에 없었고,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서울로 몰려들었다. 1960년대 서울 인구는 도시가 수용할 수 있는 규모를 이미 넘어섰고, 사람들은 조그만 땅만 있으면 판자촌을 짓고 살았다. 자연스레 도시화는 서울을 넘어 수도권으로 번져가기 시작한다.
물자는 길을 따라 가기 마련이다. 경인선과 경부선을 따라 도시가 확장되기 시작했고 경인선에 면한 부천과 경부선에 면한 안양이 먼저 개발되고 도시화되었다.
1973년 시흥군 안양읍과 부천군 소사읍이 각각 안양시와 부천시로 승격이 되면서 시흥군은 안양읍을 내어주고 본래 부천군 소속이었던 소래면이 편입된다.
이때 소래면이 부천군에서 시흥군으로 넘어오면서 비로소 소래면, 군자면, 수암면을 아우르는 지금의 행정구역을 모두 포괄하는 모습이 된다.
이후 1981년 광명시, 1986년 과천시가 승격되면서 분리되고 1989년 시흥시, 의왕시, 군포시가 시흥군에서 분리되어 각각 시로 승격되면서 시흥군은 완전히 해체되고 만다.

"도시화되고 남겨진 곳"
서울과 수도권의 팽창은 단순히 행정구역만 바꾼 것이 아니었다. 수도권은 길을 따라 성장했고, 이후 고속도로와 산업단지가 도시의 방향을 결정했다.
경부축에서는 안양과 군포, 수원이, 경인축에서는 부천이 먼저 도시화되었다. 그 사이에 놓여 있던 지금의 시흥은 오랫동안 개발의 중심이 아니라 도시와 도시 사이의 빈 공간으로 남게 되었다.
시흥은 계획되고 만들어진 도시가 아니라 도시화가 되고 남겨진 곳이다. 즉, 수도권의 변경(邊境)이었던 도시다.
하지만 이 '빈 공간'은 훗날 시흥만의 특징이 된다. 서울처럼 빽빽하게 개발되지 않았기에 호조벌은 그대로 남았고, 갯골 역시 매립되지 않고 보전될 수 있었다. 반면 주변에는 반월국가산업단지와 시화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산업 기반도 함께 갖추게 되었다.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택지개발이 시작되면서 은행지구, 연성지구, 능곡지구, 배곧신도시, 은계지구 등이 차례로 들어섰지만, 그 사이에는 여전히 농경지와 자연마을이 남아 있다. 수도권에서 이렇게 생태와 산업, 신도시와 오래된 마을이 함께 존재하는 도시는 매우 드물다.
현재 우리가 보는 시흥의 모습은 어느 한 번의 계획으로 만들어진 도시가 아니다. 일제강점기의 행정개편, 서울과 수도권의 팽창과 산업화, 택지개발이 수십 년에 걸쳐 겹쳐지면서 만들어진 결과다.
변경은 중심보다 늦게 발전하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중심이 잃어버린 가능성을 품고 있는 공간이다.
서울이 빠르게 성장하는 동안 시흥은 호조벌과 갯골을 지켜냈고, 산업 기반도 함께 갖추었다. 이제 시흥은 수도권의 변방이 아니라, 생태와 산업, 문화가 공존하는 새로운 도시 모델을 실험할 수 있는 무대가 되었다.
이 연재를 통해 그 가능성을 찾아가 보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