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시흥타임즈는 안광일 건축사사무소 오막 소장과 함께 시흥의 역사와 도시 형성 과정, 앞으로의 발전 방향을 살펴보는 기획 연재 ‘시흥, 도시읽기’를 시작한다. 연재는 총 3부, 10편으로 구성된다.
1부. 도시의 역사를 읽다. ① 수도권의 변경, 시흥 - 시흥의 행정구역 변천사, 수도권의 확장 속에 시흥의 위치 ② 소사면과 소래면 - 경인시가지계획이 가른 소사면과 소래면의 운명 ③ 지적도에 남겨진 뱀내장터(우시장)의 흔적 - 지도에서 옛 흔적 찾기 |
② 소사면과 소래면
[글: 안광일 건축사사무소 오막 소장·우리동네연구소 운영위원]
경인시가지계획이 가른 소사면과 소래면의 운명
누군가 시흥시민들에게 시흥의 중심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아마 여러 개의 답이 돌아올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시청이 있는 장현동을, 어떤 사람은 정왕동을, 또 어떤 사람은 신천·대야동을 떠올릴 것이다. 하나의 도시 안에서 중심지가 여러 곳으로 인식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보통 하나의 도시는 시청이나 번화가가 위치한 중심지를 축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시흥은 조금 다르다. 현재 시청이 위치한 장현동은 1997년 시청이 이전한 뒤에야 주변 개발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시청은 넓은 논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업무차 시흥시를 방문한 한 지인은 "어떻게 여기는 시청이 허허벌판에 있냐."며 의아해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다면 시흥의 원래 중심은 어디였을까.
1997년 시청이 장현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는 신천·대야동 일대가 시흥의 중심이었다는 데 큰 이견은 없을 것이다. 이곳의 소래면사무소는 소래읍사무소가 되었고, 1989년 시흥시 승격 이후에는 시청으로 쓰였다. 오늘날 시흥의 출발점은 바로 이 소래면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소래면도 처음부터 시흥이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의 시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시화가 시작되기 이전, 그리고 소래면과 소사면이 같은 행정구역 아래 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위의 지도에서 확인 할 수 있듯, 소래면과 소사면은 원래 이웃한 하나의 생활권이었다. 1930년대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인이 그린 부천시가도를 보면 소래면과 소래산(299.1m), 신천리 같은 지명과 함께 주요 도로와 주거지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지도가 그려질 무렵 소래면은 부천군 안에서도 인구가 많은 지역에 속했다. 당시 인구 통계를 보면 1930년까지는 소래면이 7,885명 소사면이 7,396명으로 소래면이 근소하게 더 많았지만 1935년이 되면 소래면 8,899명 소사면 9,553명으로 역전된다.
소사면이 경인선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공업화 되기 전까지 소래면과 소사면은 군내 지위에서 경쟁관계에 있었다. 당시 이웃한 소사면에서도 우시장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소래면 주민들의 반대운동에 부딪혀 결국 소사는 우시장 없이 시장을 개설하는 데 그쳤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 균형은 오래가지 않았다. 1930년대 후반 경인시가지계획의 추진 및 전시체제기로 진입함에 따라 공업화와 도시화의 기반시설이 부내면과 소사면에 집중적으로 배치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경제적 규모와 군내 지위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소래면은 군자면과 함께 쌀과 소금을 공급하는 기지로 작동하게 되고, 소사면은 경인시가지계획에 포함된 다주면, 부내면과 함께 도시화·공업화에 편승하여 전시 병참·공업기지로 발전하게 된다.


인천의 개항 이후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되고 경인선은 정치·경제의 주요한 축이 된다. 그리고 그 축을 따라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을 전후로 해서 일본은 한반도를 병참기지로 삼으려는 계획 아래 경인시가지계획을 수립한다. 그리고 이 계획선이 소사면과 소래면 사이를 갈랐다. 해방 후 경인시가지 계획은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에 따라 경인개발계획이 실시되며 부천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공업지대로 성장하게 된다.
도시는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계획과 선택의 결과물이다. 철도와 간선도로의 경로, 지도 위에 그어진 하나의 계획선, 어떤 지역에 집중된 산업시설은 도시의 성장 경로를 바꾸기도 한다.
지도 위에 그어진 하나의 계획선은 이후 이어진 국가 개발계획과 결합하면서 소사면과 소래면의 서로 다른 경로를 만들어냈다. 소사면은 공업도시로 성장해 훗날 부천시가 되었고, 소래면은 한동안 우시장과 염전을 중심으로 한 농업사회를 유지하다가 1973년 시흥군으로 편입된다.
그러나 소래면의 운명도 계속 그대로였던 것은 아니다. 1980년, 반월도시계획에 따라 신천리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이 고시되면서 소래면에도 처음으로 본격적인 도시계획이 시작된다. 논과 자연취락의 풍경은 이때부터 새로운 도시의 모습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다음 글에서는 시흥에 시행된 최초의 도시계획과 도시계획 후 지적도에 남아 있는 뱀내장터의 흔적 그리고 소래면의 풍경을 따라가 보려 한다.
번외로 아래의 지도는 1988년 부천시에서 발간한 『부천시사』에 첨부된 행정구역도다. 부천시에 인접한 지자체들이 전부 시·군으로 표기된 것과 달리 소래읍은 시흥군과 별도로 소래읍으로 표기한 것을 볼 수 있다. 1973년 부천군이 부천시로 승격되면서 소래지역은 시흥군으로 편입되었지만, 부천지역의 역사 속에서 소래는 같은 생활권을 형성했던 공간으로 기억되고 있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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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shtimes.kr/news/article.html?no=484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