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김경민] 열매 하나에서 시작된 이야기
커피나무는 인간에게 커피를 마시게 하려고 열매를 맺은 것이 아니다. 카페인 역시 졸린 인간을 깨우기 위해 만들어진 물질이 아니다. 식물은 그저 자신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진화했을 뿐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 작은 붉은 열매를 발견하고 볶고, 갈고, 물에 녹여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커피는 단순한 열매를 넘어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중요한 능력 가운데 하나로 ‘공동의 이야기를 믿고 협력하는 능력’을 이야기한다. 화폐와 국가, 기업처럼 눈으로 만질 수 없는 질서도 많은 사람이 그 의미를 공유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힘을 갖는다.
커피도 비슷하다.
인간이 만들어낸 커피의 질서
자연 속에는 스스로를 ‘스페셜티 커피’라고 부르는 커피나무가 없다. 싱글오리진이나 마이크로랏, 챔피언십 커피 역시 자연에 원래 존재했던 개념이 아니다. 인간이 산지와 농장, 품종과 가공방식을 기록하고 맛을 평가하며 가격을 부여하면서 만들어낸 질서다.
한 잔의 커피를 앞에 두고 우리는 “자스민 향이 난다”, “복숭아를 닮았다”, “초콜릿 같은 단맛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맛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다. 같은 커피를 마시고도 서로 다른 향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 개인적인 감각마저 언어로 만들고 다른 사람과 공유했다.
커핑과 향미 평가, 플레이버 휠 같은 체계는 서로 다른 나라의 생산자와 로스터, 바리스타가 커피의 맛을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든 공통의 언어다.
우리는 커피와 함께 이야기를 산다
커피의 가격 역시 단순히 맛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어떤 농장에서 누가 생산했는지, 품종과 가공방식은 무엇인지, 얼마나 희소한지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오늘날 우리는 커피라는 액체만 사는 것이 아니다. 그 커피가 가진 장소와 사람, 정보와 이야기를 함께 구매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질문도 있다. 한 잔의 커피가 내 손에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연결되어 있을까.
한 잔을 만드는 거대한 협력
생산자는 커피나무를 키우고 열매를 수확한다. 누군가는 가공하고 건조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생두를 선별하고 포장한다. 수출업자와 수입업자, 운송업자가 커피를 이동시키고 로스터가 볶은 뒤 바리스타가 마지막 한 잔을 완성한다.
서로 얼굴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계약과 화폐, 품질이라는 약속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이 점에서 커피는 사피엔스가 만들어낸 놀라운 협력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협력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 협력이 언제나 공정한 것은 아니다.
좋은 커피는 무엇인가
커피의 역사에는 식민지와 플랜테이션, 값싼 노동의 역사도 함께 존재한다. 오늘날에도 소비지에서 한 잔의 가격이 비싸졌다고 해서 그만큼의 가치가 생산자에게 돌아간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좋은 커피를 생각할 때 맛만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더 좋은 품종을 찾고 새로운 가공법을 연구하며, 로스팅과 추출을 숫자로 분석한다. 이전보다 훨씬 정교한 방법으로 커피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점수가 높고 희귀하며 비싼 커피가 곧 좋은 커피문화 전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커피가 만든 것은 ‘연결’이다
커피가 인간에게 준 가장 큰 가치는 어쩌면 맛보다 ‘연결’에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페에서는 정치와 사업, 문학과 예술에 관한 생각이 오갔다.
지금도 누군가는 카페에서 글을 쓰고, 누군가는 새로운 사업을 구상한다. 또 누군가는 오랜 친구와 마주 앉아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커피나무가 만든 것은 한 알의 열매였다. 그 열매에 이름을 붙이고, 맛을 설명하고, 가격을 매기고, 공간과 문화를 만들고, 지구 반대편의 낯선 사람들과 협력하는 거대한 세계를 만든 것은 인간이었다.
어떤 커피문명을 만들 것인가
그렇다면 앞으로의 커피문명을 결정하는 것 역시 커피나무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커피를 좋은 커피라고 부를 것인지, 한 잔에 담긴 노동을 얼마나 존중할 것인지, 자연과 생산자와 소비자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이다.
커피나무는 앞으로도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 열매 위에 어떤 문명을 만들어갈 것인가는 사피엔스의 몫이다.
글쓴이 김경민은 시흥 세계커피콩축제 감독으로, 신안산대학교 호텔제과제빵과 교수, 세종사이버대학교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교수, 세계커피연구소 소장, 아마츄어작업실 대표 등을 맡고 있다.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단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에서 커피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으로 <미니멀리즘 커피연구>가 있다.















